조선구마사/논란 및 사건 사고/고증 오류 및 역사 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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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SBS 드라마 조선구마사의 고증오류를 정리한 문서.
조선구마사는 조선 태종 시절을 배경으로 하여, 좀비와 서양 퇴마가 가미된 판타지 퓨전 사극이다. 판타지 사극은 애초에 허구적 요소가 많기 때문에 고증을 꼼꼼히 따지지는 않고, 큰 무리가 없다면 극중 장치나 연출이라 여기며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역사적 인물의 사상이나 행보가 달라진다 하더라도, 충분한 배경 설명이나 극중 흐름이 타당하다면 이 역시 별로 논란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조선구마사는 고작 1회만에 작품 내 동북공정 및 중국의 한국 문화 예속화 시도를 노리는 요인들이 많다는 주장이 인터넷과 각종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퍼져 큰 논란이 됐다.[1] 이에 따라 해당 작품의 고증 오류가 지상파 방송에서 공식적으로 언급될 정도로 큰 후폭풍을 낳았다. 악의적으로 고증해서 역사왜곡을 한 것이 문제였다.
본 작품에 역사 자문으로 참여한 이규철 박사는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문제가 된 부분에 대해서 우려를 표했고, 다른 부분도 다양하게 지적을 했으나 자신의 의견이 드라마에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2]
방송에서의 역사 왜곡은 심의 규정 위반으로 볼 수 있으며, 시청 등급이 조정되거나 방영이 금지될 수도 있는 중대한 사안이다.[3] 계획 상으로는 4화까지 19세 시청가로, 5화부터는 15세 시청가로 방영될 예정이었는데, 만약 이 드라마가 조기 종영되지 않았을지라도 심의를 거쳐 일부 내용이 15세 이용가로 부적절할 경우 5화 이후 방영분도 19세 시청가로 방영되었을 수 있다.
2. 인물 묘사 관련[편집]
2.1. 태종 왜곡 논란[편집]
태종이 태조의 환상을 보고 양민 학살을 자행하는 장면 # 이 등장한다.[4] 해당 장면에서 태종은 1)태조 이성계의 환영을 보고, 2)그 환영이 악마 아자젤의 술수라고 생각하여, 3)환영을 없애버리려고 칼을 휘두르다가 주변에 있던 백성들을 죽였다.[5] 살육은 함주성에서 이뤄졌는데 함주성은 지금의 함경남도 함흥이다. # 이 당시 조선의 함흥부는 이방원과 이성계의 고향이며 몇 대째 일가가 이어져 살아왔다. 즉 백성도 백성이지만, 대부분이 아버지와 자기와 같이 살아 온 동향 사람들이다. #
그런데 태종은 '킬방원'이라는 이미지로 표현되는 대표적인 철혈 군주이기는 하나, 실제로는 자신과 후임자인 세종의 통치에 위협이 될 만한 권신과 외척들만을 최소한으로 제거했을 뿐, 그에 해당하지 않는 다른 신하[6] 나 백성들에게는 대단히 자애롭고 관대한 임금이었다.[7][8] 그래서 조선구마사가 태종을 '학살자'로 왜곡하였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에 대해 전주 이씨 종친회는 "역사적 인물들이 워낙 많고, 개중에는 흔히 말하는 악역도 다수 존재하기에 드라마나 영화, 소설에 자주 나왔지만 종친회에서 관대하게 넘어간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번은 악의적이고 의도적인 왜곡이라고 보고 항의하겠다."는 의사를 정한 듯 하다. #
이처럼, 건드려도 하필 한국사 군주 중 미디어에 가장 많이 다루어진 인물을 건드렸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을 더더욱 들끓게 만들었다. 그 왜곡 방법도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하여, 이성계와 태종의 고향인 함주성과 목조의 생활사를 비꼬아 굉장히 치밀하게 자행됐다.# #
2.2. 충녕대군 왜곡 논란[편집]
훗날 용비어천가를 발간하는 충녕대군 역시 왜곡의 피해를 입었다. 드라마에서 가장 논란이 된 바로 그 의주 기생집 장면에서 “6대조인 목조께서도 기생 때문에 삼척으로 야반도주를 하셨던 분인데 그 피가 어디 가겠냐”는 대사를 한 것.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충과 효를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하는 유교국가였던 조선에서 조상을, 그것도 일국의 왕자가 개국을 이룬 선조의 조상을 욕보이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의 패륜에 가깝다. 또한 그 대상이 충녕대군이라는 것도 큰 문제이다. 충녕대군은 한반도 최고의 명군이라 평가받는 세종대왕이며 가장 위대한 업적인 한글 창제 이후 처음 만든 것이 바로 자신의 아버지와 조상들을 기리는 용비어천가일 정도로 국가의 정통성 그리고 효를 중요시한 왕이다.[9]
게다가 서역에서 온 사제에게 왕자인 충녕대군이 직접 술을 따라주고, 사제 일행이 식사를 하는 동안 상 구석에 서 있는 장면이 나와 이 역시 논란이 되었다. 명나라 황제가 직접 보낸 사신도 아니고[10] 서역의 사제를 맞이하면서 한 나라의 왕자가 상 구석에 서있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장면이며, 조선시대의 가장 위대한 왕조차도 별볼일 없는 하찮은 존재로 왜곡하여 묘사하는 것으로 읽히기 충분하다.
한 언론매체의 확인 결과 조선구마사는 막바지 촬영을 진행 중이고, 지금까지 나온 대본에는 악령과의 거래를 통해 조선을 건국했다는 설정이 등장한다고 한다. 한술 더떠서 훗날 세종이 되는 충녕대군이 바티칸 구마 사제의 구마 의식을 보고 배우며 구마사가 된다는 설정까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2.3. 최영 비하 논란[편집]
기사 링크"그 목사가 충신 최영 장군의 먼 일가 친척이라는 말도 있던디... 그랴도 되겄습니까?"
"충신? 하이고... 충신이 다 얼어죽어 자빠졌다니? 그 고려 개간나 새끼들이 부처님 읊어대면서 우리한테 소, 돼지 잡게 해 놓고서리... 개, 백정새끼라고 했지비아니?!"
조선구마사 2화 중에서
고려 말의 충신인 최영 장군을 여말의 부패한 권문세족처럼 묘사하여 문제가 되었다. #[11]
최영은 최영 개인의 안위가 고려의 위상과 직결될 만큼 존재감이 거대해서, 일찌감치 무속인들에 의해 신령으로 떠받들어졌고, 최영을 죽인 이성계가 사당을 세워 최영 영정을 모셔 민심을 다독일 정도로 백성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인물이다. 참고로 무속에서는 '최일장군신[12] '이라고 부른다.[13]
경상도, 강릉도, 전라도의 3도에서는 왜구로 인하여 생업을 잃고 민들이 많이 굶어 죽었다. 최영이 여러 도에 명령을 내려서 시여장(施與場)을 설치하여 자비롭고 선량한 자를 뽑아 이를 주관하게 하였으며, 관청의 쌀을 내어 죽을 만들어 진휼하고 보리가 익은 후에야 그만두었다.
고려사 제113권 - 열전 제26
그리하여 강직용맹하고 청렴했던 최영은 이성계에게 잡혀 고향인 고봉현(高峯縣)으로 유배되었다. 그 뒤 다시 합포(合浦), 충주로 옮겨졌다가 공료죄(攻遼罪)로 개성에 압송되어 순군옥(巡軍獄)에 갇혔고 그 해 12월에 참수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개성 사람들은 저자의 문을 닫고 슬퍼하였으며, 온 백성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최영」(민병하,『한국의 인간상』 2,신구문화사,1965)
그리고 이건 신경수의 작품들에서 일관되게 드러나는 문제점인데, 2020년대에 '부패한 권문세족 vs 개혁적인 신흥사대부'라는 구도 운운했다가는 학부생 레벨에서도 탈탈 털린다. 이 이분법이 학계에서 재론의 여지조차 없이 철저히 폐기처분되고 강산이 몇번 바뀌었다. 현재 사학계에선 여말 정치집단들을 부원세력, 국왕 측근 세력, 권문세족, 신흥유신으로 구분한다. 권문세족은 원 간섭기에 성장한 세력들을 묶어서 부르는 명칭이지 옛날처럼 조선 건국에 반대한 불교 기반 보수 정치세력이 아니다. 권문세족들도 고려의 개혁 논의와 조선 건국에 참여했고, 성리학을 원나라에서 들여온 사람들이다. 신흥 유신들 중에도 조선 건국에 저항한 이들이 많고, 불교는 신흥 유신이나 권문세족이나 똑같이 받아들였다.
굳이 아귀를 맞춰보자면 해당 발언을 한 이들이 당시 사회상으로 '천민'으로 분류되던 도축업자들이고, 그런 자들에게 누가 왕이 되든 어떤 왕조가 지배하게 되든 사회적인 차별은 사라지지 않고 있는 와중에서는 "그놈이 그놈이지 뭐" 정도의 심리를 토로한 표현이라고 볼 여지도 없지 않다. 주류 사회에서 영웅으로 추앙되는 존재를 단순히 개인의 감정 풀이용으로 트롤링하며 깎아내리고 비웃는 부류는 현대에도 존재하기 때문. 계급 사회에서 어느 계급의 가치가 다른 계급에서 전혀 통용되지 않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아무리 위대한 업적을 이룬 영웅, 위인 또는 의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행적을 칭송하고 기려야 한다고 한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참 지겹다. 언제까지 팔아먹을래?", "그래서, 그것들이 우리 밥 먹여주냐?'ㅋㅋ" 정도의 삐딱한 감정을 품고 냉소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14]
즉, 위정자들은 태평성대라고 한들 하층민에게 욕을 먹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사실은 어쩔 수 없는데, 더군다나 저 발언을 한, 당시 사회적으로 천민으로 분류되던 '화척' 도축업자들의 경우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바뀌었어도 내내 비주류에 속했던 계층들이고, 그들의 입장에서는 고려 사회가 피냄새 난다고 재수 없으니까 가까이 오지 말라고 대놓고 차별을 했건, 조선 정부가 자신들을 어떻게든 품고 가려고 애를 썼건, 자신들이 사회로부터 받는 처우에 대한 일종의 묵은감정, 응어리가 여전히 남아서 사회에서 통용되는 가치들을 도리어 "있는 놈들의 위선", "잘난체 하는 놈들의 가식"이라고 경멸하면서 당시 양민으로 분류되던 양반이나 농민, 상인, 수공업자 등의 하나같이 충신이라고 추켜세운다 한들 그들의 입장에서는 "그래서 그것들이 우리 밥 먹여주냐? 그래서 그 잘난 도덕 가지고 우리는 그렇게 신나게 차별하냐? 그거 참 선택적 도덕률이네ㅋㅋ" 정도의 삐딱한 냉소를 품고 저런 소리를 할 개연성이 있는 것이다.
애초에 화척(백정)들처럼 사회에서 '혐오 대상'이자 '비주류'로 낙인 찍혀서 사회적 지위나 계급을 올릴 수 있다는 가망도 없어서 현재의 상황을 개선해보겠다는 의지도 갖지 못하는, 한마디로 "'내일 같은 건 모르고 오늘만 사는'"데다, 정치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알 필요도 없는 사람들이 지배층 가운데 누가 충신이고 누가 간신이든 무슨 관심이 있겠는가.
물론 이렇게 애써 이해해주려 해도 잘 쓰인 대사는 아니다. 상술한 뜻이라 쳐도 충신이 다 얼어죽어 자빠졌다니가 아니라 충신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냐는 투의 대사가 적절했을 것이다.
2.3.1. 신백정 관련 고증오류[편집]
그리고, 위 장면에서 백정과 화척이 아직 분리되어 있을 조선구마사의 시기에 도축업자를 개백정이라고 부르며 깎아내린다는 것은 고증오류이다.
조선 세종 이전까지 '백정'은 일반 농민을 일컫는 말이었고, 농민들과 상이한 습속을 유지하며 천대받던 도축업자를 가리키는 말은 양수척(楊水尺), 수척(水尺), 화척(禾尺), 무자리 등이다. 백정이 도축업자를 가리키는 명칭이 된 건 조선시대 세종대 반쯤 화적 떼나 다름없는 화척을 동화시키기 위해 이들도 백정으로 부르게 하고 나서부터다.[15]
이후 백정이라 불리게 될 화척이 멸시의 대상이 된 이유는 이들이 한민족과 완전히 상이한 그들의 풍속을 버리지 않고[16] 남녀불문 말 타고 활 쏘며 살인, 강도, 방화, 약탈 등 각종 중범죄를 일삼았기 때문이다. 또한 화척(세종 이후 백정)이 도살업을 전담하게 된 이유는, 조선 초기까진 분명히 존재했던 백정 외 양인 도축업자들이 농업에 쓸 소를 보호하기 위한 정부의 소 도살 금지령에 자신들의 가업을 폐업했기 때문이다.
원래 고기 많이 먹고 위법 행위를 일삼던 평민 하류[17] 화척(신백정)들은 금지령도 무시했기에 그들이 도축업을 전담하게 된 것이지 나라에서 의도적으로 이들에게 도살업을 떠넘기고 멸시하게 한 게 아니다. 세종실록과 문종실록에 수록된 바에 따르면 전국의 살인, 강도범의 절반이 백정이며 세조때 백정이 심한 욕설이 되고, 성종대엔 백정이 곧 범죄자를 뜻하게 될 정도로 그들의 범죄는 심각한 사회문제였다.
그리고 최영 운운하는 대사에 이어지는 대사도 심각한 문제다.
"뭐 그래갖고 조선이라고 달라져분 것도 없응께 하는 말이지. 아니 나라가 바뀌면 맘 놓고 도살해갖고 이밥에 고깃국 먹고 살라더니 금살도감 만들어갖고 싸그리 다 잡아넣어 버렸잖여 별이 아부지도 그래갖고 잡혀간 거 아니여"
"그러니까 내말이 그말임매 조선 간나 새끼들 고려 간나 새끼들 다 똑같지비 개간나 새끼들"
"그려.. 잡어! 고려충신이든.. 조선 간나 새끼들이든 다 잡아불자고"
전술했듯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우금령을 내려 농사에 쓸 소를 보호하려 했고 이것이 백정 외 도축업자들이 사라지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니까 조선은 맘 놓고 소 도살해서 고기 먹으라고 한 적 없다. 신백정이 유랑민에서 벗어나기 이전 조선 태조부터 중종때까지 조선의 신백정 정책은 한결 같았다. 정착시키고 농민들과 동화시키자. 농사짓게 만들어야 할 사람들에게 농사에 필수인 소 도살 마음대로 하라고 권하는 정부가 어디있나?
그리고 백정집단이 북방에서 튀어나오는것도 오류다. 조선시대 백정 범죄 기록이나 구한말 형평운동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살펴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인데 백정들이 많이 거주한 곳은 남부 지방이다. 명종때 임꺽정이 발호한 황해도 지역부턴 백정범죄가 심각했지만 평안도, 함경도는 지속적으로 사민 정책을 실시했을 정도로 인구가 적어 백정 관련 기록도 거의 없다. 이는 백정이 이민족의 후손이라는 주장을 반박하는 근거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북방에 대규모 백정 집단이 있었다면 세종대에 백정들을 긁어모아 북방으로 사민시키자는 의견이 나올 일도 없었다.
참고로 조선구마사 사건을 계기로 조명받은 근육조선 27화에서도 양수척과 화척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일개 웹소 작가의 데뷔작도 최소한의 용어 고증은 했는데, 1995년부터 20년 넘게 각본을 써 온 박계옥 작가는 이를 무시했다. 인지도가 거의 없는 목조의 이력도 다 안다는 사람이 인터넷에 한 번 치면 나오는 백정의 명칭의 변천은 여태껏 몰랐단 말인가?
3. 교황청 관련 고증 문제[편집]
작중 통사인 마르코는 요한 신부와 함께 "우리들은 바티칸에서 왔으며, 그곳은 농사가 잘 되고 포도가 많은 땅이다"라고 언급한다. 그러나 교황청은 당시는 이탈리아 중부에서 로마를 중심으로 훨씬 큰 영토를 영유하던 교황령을 둔, 일반적인 국가에 가까운 나라였다. 바티칸이라는 이름 자체는 로마의 언덕 중 하나로 성 베드로 대성당 뒤에 있는 바티칸 언덕에서 따왔으며 이후 베니토 무솔리니가 성 베드로 대성당과 바티칸 언덕 일원을 교황청에게 양도하는 라테라노 조약으로 인해 바티칸이 교황청의 대명사가 된 것은 1929년의 일이다. 그러므로 사제가 바티칸에서 왔다고 한다던가 바티칸 언덕같은 조그만 언덕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것 역시 말이 안된다. 로마에서 왔다고 하는 것이 옳다.
바티칸이라는 어휘 대신 "로마" 혹은 "교황령", "교황청"이라는 다른 선택지도 많은데 굳이 1929년 성립된 국가 이름인 바티칸이라는 어휘를 선택한 정황도 당혹스러운데, 조선 초를 다룬 사극에서 바티칸이라는 명칭을 언급한 것은 Wetv의 해당 작품 소개에서 조선을 북한으로 언급한 것처럼 황당한 왜곡으로 보일 여지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국내 기록에 유럽 관련한 기록이 없는 것도 아니라, 태종 때 나온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 이미 로마를 포함한 이탈리아가 표시되어 있다.
작품 내 직접 고증이 틀린 것 외에도 핍진성이 결핍된 설정이 지적받는다. 시기적인 면에서도 오류가 존재한다. 원나라 시기까지만 해도 중국 내 기독교라고 하면 네스토리우스 기독교였으나, 이들은 에페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를 받은 교단이었다. 즉,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으나 교황청과는 정반대의 입장인 셈이다. 이후, 원대에 가톨릭 선교사들이 입국해 천주를 중심으로 교회를 세우고 교단을 유지했었다. 다만, 그 규모가 그리 크지 않고, 기록이 많지 않아 잘 주목받지 못했으며 원명 교체기의 혼란을 겪으면서 교단이 붕괴했다.
그 다음에 선교를 시작한 것이 바로 예수회의 선교사들인데, 명나라에 직접적인 선교를 한 것으로 알려진 마테오 리치 역시 중국에 입국한 것이 1577년이었으며, 그마저도 수도 북경으로의 입경이 허가되지 않아서 1601년이 되어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18] 마테오 리치의 서적인 『천주실의(天主實義)』가 조선에 전파되기도 했으나 그마저도 1600년 이후의 일이다. 예수회의 선교 이후 교황청에서 조선에 직접적으로 선교사를 파견했던 시기는 1836년 파리 외방전교회를 통해서였다.[19]
반면에 태종의 집권기, 그것도 태상왕이 아닌 드라마에서 묘사된 것처럼 현직 국왕으로서 통치한 시기는 1400년에서 1418년까지이다. 즉, 태종이 한참 왕으로서 활약하던 시기에는 교황청의 선교사를 만나고 싶어도 존재하지 않아 만날 수가 없었다. 천주를 중심으로 하는 천주교 교단이 원명 교체기에 붕괴한 이후, 유럽의 선교사들은 네스토리우스 기독교의 선교사들을 제외하고는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등 열강 국가들이 동남아시아에 거점을 마련한 뒤에서야 겨우 중국 남부를 통해 들어왔고[20] 1600년 이전에는 입경조차도 허락되지 않았는데 그런 선교사들이 만주 일대에 도착해 조선 왕자, 그것도 왕의 셋째 아들의 대접을 받는다는 것은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태종 집권 시기의 로마 교황들은 머나먼 미지의 조선에까지 선교사(구마사)를 보낼 여력이 없었다. 태종 즉위 초와 겹치는 보니파시오 9세 시기에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 바예지드 1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위협하는 일이 있어 십자군을 모으느라 애쓰고 있었고, 그 후임인 인노첸시오 7세는 대립교황인 베네딕토 13세와 다투느라 바빴으며, 후임인 그레고리오 12세는 교회 분열을 끝내기 위한 '콘스탄츠 공의회'를 개최했고, 마르티노 5세는 얀 후스의 지지자들과의 분쟁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21] 이렇게 공사다망(?)한 교황들이 당시 말로만 들었던 신비한 동방으로의 선교를 생각할 리가 없었다.
또한 교황과 한반도는 그 때까지 교류가 전혀 없었다. 교황이라는 존재가 동아시아 역사에서 등장한 게 교황 인노첸시오 4세가 몽골 제국의 귀위크 칸에게 서신을 보내 기독교로 귀의할 것과 헝가리를 침공한 것에 대한 해명을 요구한 것이 처음이기 때문. 조선 이전에 교류한 역사가 없는데 어딘지 알 수도 없는 나라에서 온 왕자의 편지 한 장에 저명한 구마사를 보낸다는 설정은 방영 초부터 우려를 자아냈다.
4. 복식 / 갑주 관련[편집]
4.1. 복식[편집]
다만 그 밖의 주요 인물들이나 의주 근방 중국식 기생집 장면의 기생들이 조선 후기의 짧은 한복을 입고 있는 등 고증이 틀린 장면이 존재하는 것도 맞다. 소모성 장면은 고증이 정확하지 않은 듯하다.
또 곤룡포를 제외한 궁중 복장들이 18세기 이후~조선 후기의 디자인에 해당된다는 주장이 있는데, 일단 남성 신하들의 복장의 경우 SBS의 전작 육룡이 나르샤에서 사용한 궁중 의복을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육룡이 나르샤는 여말선초를 배경으로 삼은 조선 건국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그리고 남자 배우들의 경우 갓을 쓴 인물을 찾아볼 수 없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주연급 인물들은 스타일을 고려해서인지 모자를 쓰지 않은 모습을 더 자주 보여주지만 액스트라나 단역들 중에서 갓을 쓴 인물들을 찾아 볼 수 있다. 갓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흑립은 원 간섭기를 거쳐 유입되었지만, 갓의 조상격인 모자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흑립이 아니라면 발립이나 죽립, 정 아니면 문라건이라도 쓰고 다닐 수 있다.[23]
다만 작중에서 원명왕후가 입은 당의는 세부고증이 잘 되지 않은 예시 중 하나로 들 수 있다. 배경이 되는 태종 시기부터 병자호란 이전까지 왕비는 평상복으로서 장저고리, 배자를 입었으며, 그위에 단삼이나 장삼을 겹쳐 입었다. 그 외에도 원명왕후는 가체 없이 쪽머리에 첩지 하나만 올렸는데, 첩지가 생겨난 시기는 영조, 정조 때 시행된 가체 금지령 이후이며, 순조 때부터 가체를 대신한 쪽머리, 족두리와 함께 장려된 것이었다. 또한 첩지 자체는 족두리를 고정하는 데 쓰이는 용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는 대부분의 한국 사극이 범하는 실수.
한편 무당 복식의 경우 고증오류가 비교적 심각한 편이다. 삼국시대 전후의 제사장은 창작의 여지가 있지만, 조선의 경우 남아 있는 그림만 봐도 알 수 있듯 무속 의례에 동원된 기녀들이 오방색을 반영한 화려한 색상의 무복을 입었다. 그런데 본 드라마의 국무당 복식은 소복처럼 하얀데다 그 양식이 조선의 여성 한복과 괴리감이 심하고, 천녀유혼이나 고장극 등의 중화권 사극에 등장하는 옷과 굉장히 유사하다.# 이에 국내에서는 역시 동북공정의 일환임을 주장하며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었고, 중국에서는 한국이 자국 매체를 표절했다며 양국 드라마 속 인물의 모습을 비교한 이미지가 돌아다니기도 했다.#[24]
다만 비교 대상으로 거론된 중국 작품들 역시 판타지물로, 해당 복식이 실제 중국의 무복인 건 아니다. 애초에 한국·일본과 달리 중국에서는 도교가 무속의 역할을 포함하기 때문에 굿 등을 동반하는 무속 의례는 소수민족의 문화쯤으로 취급되었고, 이들의 무복도 전통 의상에 기반해 굉장히 화려하다. 궁중 무속이 존재한 청나라 시기의 무복을 보면 알 수 있다.# 즉 중국에서도 상기 스타일은 판타지고, 의복 양식이 유사한 삼국시대 전후라면 얼마든지 구현될 수 있는 디자인으로 이 경우 무턱대고 중화풍이라며 문제를 제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25] 또 궁중 의례가 아닌 씻김굿 등의 지방 무속은 굿을 주관하는 무당을 비롯한 의식 참여자가 전부 하얀 옷을 입는 등 복식의 양상이 다양하기 때문에 본작처럼 궁중 무속을 다루는 게 아니라면야 조선이라고 해서 무조건 화려하다고 단정짓는 것도 금물.
4.2. 갑주 및 무장[편집]
이 드라마에서 청동은 악령을 물리칠 수 있는 물질로 설정되어 있다. 극중에 등장하는 병사들이 서양식 플레이트 갑옷과 유사한 차림으로 등장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들이 입고 있는 갑옷과 방패가 청동으로 제작됐다는 설정이다. 실제로 배경만 조선인 판타지이기도 해서인지 이방원과 그의 부하들이 입은 갑옷은 판타지스러운 외양이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판타지 드라마 왕좌의 게임의 라니스터 가문 근위대 갑옷을 베껴왔다. 흉갑 부분을 보면 판박이. 라니스터 가문 갑옷은 애초에 사무라이 갑옷과 서구 갑옷을 혼합한 형태로 디자인되었는데 결과적으로 사무라이 갑옷을 벤치마킹한 갑옷을 베껴왔다는 이야기이다.
벤치마킹 결과물이라도 좋으면 모를까 320억 투자한 사극에서 등산용 패딩 필이 나는 의상을 입고 있다.# 패딩을 갖다가 갑옷 분장이라고 입히는 일은 과거의 태조왕건 등 대하드라마에서도 지적된 적이 있긴 하다. 그러나 태조왕건은 분량이 긴 대하드라마였고 조선구마사는 총 16화 분량이다. 애초에 두 작품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실례인 건 둘째치고, 어떻게 제작비는 더 많이 들었을텐데 훨씬 더 적은 분량으로도 더 형편없는 결과가 나왔냐고, 제작비를 도대체 어떻게 쓴 거냐는 말이 나와도 할 말 없다.
고려 후기 ~ 조선 초기 정예군을 묘사하고 싶다면 고려 후기부터 사용이 확인되는 경번갑, 쇄자갑이나 삼국시대부터 사용해온 찰갑 중에 고르면 된다.
무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자면 조선군 병사들이 칼을 모두 손에 들고 다니는데, 환도는 띠돈이라는 360도 회전 가능한 고리에 달아 허리에 차는 것이 기본이었다. 그래야 두 손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진을 잘 보면 작중에 사용된 검은 환도 대신 굳이 청나라 강희제의 칼을 모방한 소품#을 사용했다.[26] 일개 무사도 아니고 옷차림부터 화려한 왕족 옷차림인데 환도가 아닌 청나라의 검을 휘둘렀다. 이는 고증 오류다.[27] 이후 저 중국식 무기들은 SBS가 방영한 과거의 드라마 연개소문(드라마)에서 고구려-수 전쟁에서 병사들이 쓰던 칼로 확인됐다. 즉, 다른 작품에서 쓰인 잘못 고증된 소품을 돌려막기로 쓴 것.
방패도 극중 정체불명의 판타지 방패와 다르게, 조선은 모양이 둥근 모양인 원방패(圓防牌)와 장방형인 장방패(長防牌)를 사용했다. 특히 원방패는 상대적으로 가볍고 철로 테두리를 두른 것으로 주로 보병이 단병접전용으로 사용했다. 조선 초기에는 방패를 팽배(彭排)라고 하고, 이것으로 무장한 병사를 팽배수라고 하였다. 팽배수는 왼손에는 방패를 들고 오른손으로는 환도를 잡았다.
4.3. 구마사[편집]
마테오 리치의 사례를 들자면 처음 명나라에 도착할 당시 마테오 리치는 일전에 도착한 포르투갈인 항해사 토메 피르스가 유럽 복식을 그대로 입고 갔다가 관아에 붙잡혀서 고문을 당해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중국인들에게 친근감을 주기 위해 불교 승려처럼 복식을 차려 입고 다녔으나, 유생들에게 무시당하자 이후 유생처럼 하고 다녔다. 그러자 유생들이 예전보다 태도가 부드러워졌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후 마테오 리치는 명나라 조정에서 대포 제작 기술을 감독하는 역할을 맡는 대가로 천주교를 선교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았는데, 마테오 리치가 관복을 입고 다니며 선교를 하자 많은 신자들이 생겼다고 한다. 유럽 선교사들이 자국 식민지도 아닌 지역에서 현지 복식 대신 원래 유럽식 복식 그대로 입고 다닌 시대는 제국주의 시대 이후이다. 이마저도 대도시를 위주로 다녔던 유럽 선교사들과 달리, 중국을 탐험하던 유럽인들은 얄짤없이 현지 복식을 입고 다녔다.[28][29]
물론 이 부분에 있어서는 작품 전개에 있어서 '유럽인 선교사가 한복을 입고 있으면 어떻게 캐릭터가 차별화가 되냐?'는 옹호가 나올 수도 있지만, 이미 백인 배우를 캐스팅한 이상 큰 문제가 될 만한 부분도 아니다. 또한 과거 중국의 유대인들이나 중국 무슬림들이 중국식 복식을 입고 다니되 약간의 차이를 두어 서로를 구분했던 것처럼, 백인 배우의 한복 복식에 약간에 소품으로 차별화하는 걸로도 시청자들에게 캐릭터에 대한 인상을 주기 충분했다. 그리고 애초에 복식 논란이 나온 배경은 해당 작품의 동북공정, 한복공정 및 한국사 폄하에 있다. 중국의 지원을 받은 해당 드라마가 유럽인 선교사 캐릭터를 비중 있게 넣은 이유가, 조선 시대 폄하를 염두에 두었다는 합리적 의심을 사는 상황이다.
극중 개그코드라는 핑계로 감히 통역관 따위가 충녕대군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반말을 찍찍 내뱉는 것은 황당함을 넘어서는 노골적인 모욕이라고 할 수 있다. 도움을 주러 왔다고 왕자에게 반말을 한다? 심지어 사제와 통역관이 앉아서 식사를 하는 동안 충녕대군은 옆에 앉지도 못하고 서있다. 적대국이나 속국도 아닌 나라의 왕자를 이렇게 하대하는 연출을 넣은 이유가 드라마 내 여타 다른 요소들과 오버랩되어 한국 폄하라는 합리적 의심을 사고도 남는다. 남한산성에서 청나라 통역관 역할을 한 정명수가 조선의 대신에게 존칭을 사용하지 않는[30] 경우가 있지만 그 때는 설정상 조선에서 노비로 갖은 고초를 겪은 원한이 쌓여있는데다가 전쟁을 하러 온 입장이기에 적군의 입장이었다. 조선구마사의 경우와는 완전히 경우가 다르다.
5. 국경지대 묘사 및 식문화 고증 논란[편집]
조선구마사 논란의 시초이자 핵심. 한류에 빌붙어서 해외 한류팬들에게 만주를 전통적인 한족 거주지역으로 묘사하려는 시도로 간주되어 방영 1, 2화만에 큰 논란이 되었다.
드라마를 보면, 통역사 마르코가 대접이 형편없다며 혼자 난리를 피우자 충녕대군이 그를 달래기 위해 구마사를 비롯한 전체 일행을 기생집으로 데려가는 장면이 나온다. # 그런데 해당 기생집은 중국식 인테리어 물품을 사용했으며, 조선에 소재한 기생집이라고 설정된 배경이 입식생활을 하는 당시 전형적인 중국식 가옥의 형태인 데다, 월병, 중국술, 중국 만두, 피단[31] , 감자[32] , 고기류 음식이 올라와 있어 조선구마사가 동북공정을 시도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33] # 또 중국 방식에 더 가까운 입식으로 의자에 앉아서 식사를 하는 장면에 의문을 표하는 네티즌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위 상차림에서 대놓고 고증에 어긋나는 것이 있는데 바로 감자다. 식탁 위에 감자가 있는데, 당시 감자는 한반도, 중국은커녕 유럽에도 없었다. 작중 시기는 태종이 즉위한 1400년 근방인데, 감자가 유럽인들에게 소개된 시기는 1565년이다. 즉, 작중 시기보다 100년 후에나, 신항로가 개척되고 엘리자베스 1세 정도 시대는 돼야 유럽인들이 감자라는 존재를 '인식'하였다. 아메리카에서 자란 감자가 유럽을 거쳐 동아시아까지 전래되는 건 작중 시기보다 약 400년 뒤의 일이다. 한국에 감자가 처음 들어온 시기는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따르면 1824-5년 쯤으로 청나라를 통해 전래되었다고 한다. 자세한 것은 감자/역사 문서 참조.
만에 하나 당시에 감자가 있었다고 가정하더라도, 감자는 대표적인 구황작물로 정말 먹을 게 없던 가난한 백성이나 먹던 것이었다. 감자가 사람이 먹을 만한 음식으로 대접받기 시작한 것은 1744년 프리드리히 대왕 등의 노력을 통해 '감자는 싹 난 껍질과 함께 먹으면 안 된다'는 상식이 퍼진 이후이다. 그 이전에는 주로 돼지 사료로 사용하거나 가난한 소작농들이 어쩔 수 없이 먹던 음식이었다. 그런 감자를 접대 음식으로 내놨다는 것은 엄청난 결례나 마찬가지이다. 정말 봐줘서 감자국수나 감자떡처럼 최소한 감자를 이용한 요리를 내놓았으면 요리와 관련해서 눈썰미가 좋은 사람들에게 조금 지적받는 옥의 티로 넘길 수 있었겠지만, 어디 급하게 피신가는 것도 아니면서 껍질도 안 벗긴 찐감자를 내놨다는 것 때문에 역시 말도 안 되는 행동이다.
이 장면과 관련하여 첫방 직후부터 시청자 게시판에 역사왜곡을 비판하는 항의글과 "당장 방송을 중지하라"는 게시물도 연이어 올라왔다.#
그리고, 해당 장면에서 사용된 자기들 또한 해당 시기 및 장소에 걸맞지 않는 문제가 있다.#
그런데 조선구마사에서 음식이 나오는 장면은 중국풍 기생집에서만이 아니다.
따라서 조선구마사는 다른 장면에서는 한식을 등장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기생집 장면에서는 중식이 등장한 것인데, 일단 이후 제작진이 발표한 입장문에서는 해당 장면에 '의주 근방(명나라 국경 부근)'이라는 자막이 삽입되어 있음을 언급하며 "명나라 국경지에 가까운 지역이다 보니 중국인들의 왕래가 잦을 것 같아서 상상력을 가미해서 넣었다"고 해명을 했다.#
하지만 논란은 쉬이 사그라들지 않았고, 오히려 제작진의 주장과 반대되는 역사적 사실이 지적되었다.
5.1. 당시 의주의 상황[편집]
제작진의 상상력이 역사적으로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을지라도 위 지도와 같은 상황에도 조선왕조실록에는 공적인 차원에서나 민간적 차원의 경제적, 국가적 교류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는 작중 상황처럼 기생집이 생길정도로 융성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무역을 금지해왔으나 백성들은 법과 무관하게 의주나 압록강을 넘나들며 요동반도 등지에서 무역을 행했다. 다음은 조선왕조실록에서 발췌한 의주 일대에서 행해진 무역과 관련한 기록이다.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12월 24일 경오 1번째기사
"감찰(監察)을 의주(義州) 등지에 보내어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가서 무역하는 것을 금하게 하였다".
그 전까지 민간에서 무역이 이뤄진 것으로 시사하는 기록이다.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4월 16일 경인 2번째기사
"진왕부(秦王府)에서 사람을 보내어 소[牛]를 무역하기 위하여 의주(義州)에 도착하였습니다."
진왕부에서 소를 무역하기 위해 의주로 사람을 보냈다. 여기서 말하는 진왕은 주원장의 둘째 아들 주상이다.
태종실록 14권, 태종 7년 10월 20일 경자 1번째기사
사헌부에서 교서 교리(校書校理) 이간(李簡)의 직을 파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이간이 일찍이 지용주사(知龍州事)로 있을 때에 요동(遼東)의 군인이 경내(境內)에 흩어져 들어와서 사사로이 우마(牛馬)를 무역하여도 능히 금지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체임(遞任)되어 서울로 올라왔다. 헌사(憲司)에서 죄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현임(現任) 수령(守令)의 예에 의하여 태(笞) 50을 때려 복직(復職)시키라."
사헌부가 이간이라는 인물의 직을 파하라고 청하며 한때 지용주사로 의주에 있을 때(용주는 압록강 부근이다.) 요동 군인들이 의주로 넘어와 우마를 매매했다는 기록으로 보인다.
태종실록 33권, 태종 17년 윤5월 18일 계유 2번째기사
임금이 헌부(憲府)에 명하기를,
"지난번에 박초(朴礎)를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삼았더니, 헌부에서 불가하다고 고집하므로 내 그 말을 좇아서 보내지 아니하였다. 박초의 사람됨이 임사(任使)할만 하여서 이제 의주(義州)로 보내니 너희들 대간(臺諫)은 이 뜻을 알라." 하니, 장령(掌令) 정흠지(鄭欽之)가 아뢰기를,
"박초의 천성은 본래부터 청렴하지 못합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은 그를 쓰심이 불가하다고 여겨집니다. 또 의주(義州)는 경계가 중국과 연접하여 저 나라와 우리 나라 사람들이 무역할 물건을 가지고 왕래함이 잇닿아 끊이지 아니하니 제주(濟州)보다 더욱 어렵습니다. 진실로 청렴하지 못한 사람을 임사할 곳이 아니오니, 다시 청렴 공정한 사람을 택하여 차견(差遣)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당초 조선은 정부 차원에서 무역을 금지했다. 그러나 백성들은 법을 무시하고 의주나 그 근처에서 무역을 하는 사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조선 초 상업은 수도의 육의전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주로 5일장, 7일장[34] 즉 시장바닥에 상인들이 돗자리 깔고 모여서 물건을 거래하는 형태였고, 같은 시기 의주 무역보다 규모가 결코 적지 않았을 명나라와 몽골 오이라트 사이의 대규모 말 무역 역시 허허벌판에서 이루어졌다. 즉, 교역이 존재하기는 하였으나, 작중처럼 조선땅에 중국풍 기생집이 생길 정도는 아니다.
6. 농악무 논란[편집]
농악무를 보여주는 연출도 문제가 있다는 의견이 존재하는데, 굳이 연변 사투리를 쓰는 인물이 나타나서 농악무를 비중있게 보여준다며 시나리오 작가 박계옥의 역사왜곡 의도성을 의심하는 주장이 제기됐다.
드라마의 농악무가 고의로 삽입되었으며 이는 중국에 의한 우리나라 농악무 등의 문화 약탈의 일환이라는 의견이 있다.# 농악무, 중국이 먼저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록 아리랑 중국에 빼앗기나? 현지 무형문화재 지정
다만 드라마 속 인물이 구사한 언어는 함경도 방언이다. 19세기 경 함경도 거주민들이 연변과 러시아 극동 지방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언어적으로 비슷한 형태를 띈다.
7. OST 관련 논란[편집]
- OST가 중국 악기로 연주되었다며 논란이 되었다. 중국 악기 고금, 쟁으로 연주한 곡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는데, 이미지 형태로 유포된 해당 주장의 최초 출처가 더쿠인 것으로 확인된다. 해당게시물은 3월 23일 오후 2시에 게시됐다. 하지만 삽입곡중에 포함이며, 조선구마사 OST는 이후 같은 날 오후 6시에 최초로 각종 음원 사이트를 통해 공개됐다.
- 제작 중단 이후, 위에 나온대로 OST에 중국의 10대 전통음악인 월아고, 고산류수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 밝혀졌다. 이 곡들은 중국에서는 유명한 전통악곡으로 알려져 있으나 한국에서는 전공자들도 존재 자체를 거의 모르는 곡이어서 또 다른 충격을 주었다. 유튜브에서 한글로 월아고, 고산유수(또는 고산류수)로 검색을 하는 경우 한 개 혹은 두 개정도의 연주동영상이 나온다. 심지어 고산유수는 그 중 하나가 중국 CCTV의 한국 유튜브 채널이다. 그러나 한자로 月儿高, 高山流水를 검색하는 순간 수없이 많은 영상이 뜬다.1978년 중국회사에서 레코딩 된 월아고중국 CCTV 유튜브 영상에 나오는 고산류수. 이것을 중국의 문화왜곡과 연결해 생각해 본다면, 한국 드라마에 중국의 대표곡이 들어가는 것을 빌미로 중국인들이 한국 문화의 중국에 대한 종속성을 주장하거나, 한국 드라마에 대한 관심으로 드라마 OST를 적극적으로 소비하는 외국팬들에게 중국의 전통곡을 소비하도록 유도하는 목적일 수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 결국 1주차 방영 후 조기 종영되면서 가장 먼저 공개된 황건하의 '월화가'를 제외한 다른 OST들은 공개되지 않았으며, '월화가' 역시 각종 음원 사이트에서 서비스가 중단되어 감상할 수 없다.
8. 궁궐도 논란[편집]
- 메인 포스터 궁궐도에 묘사된 조선 궁궐 내부의 모습 또한 논란이 있다. 궁궐 내부가 주변 지형에 맞추는 조선풍이 아니라 주변을 깎고 메워서라도 완전 대칭형으로 맞추는 중국풍이라는 것이다.
9. 반응[편집]
- 역사 유튜버이자 강사 황현필은 "작가가 의도성이 있는 것 같다"며 여러 가지 논란에 대해 인정하며 조목조목 지적했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조선구마사>의 문제점에 대해서 신속하게 다뤄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고 한다. 이 영상이 조회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3월 26일 SBS가 저작권 침해를 이유로 영상을 막았다가, 비난이 거세지자 다음 날인 3월 27일 다시 풀렸다. 이후에도 조회수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